2010. 11. 29. 12:08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수용소에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순간 꿈의 내용은 벌써 희미해졌지만 두려운 느낌은 생생히 남아있다.
주로 밤에 잠들기 전에 책을 읽는데 2주 동안 쁘리모 레비를 읽어서 그랬나보다.
따뜻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책을 읽어도 그가 묘사하는 수용소의 추위, 배고픔이 생생히 느껴졌고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편안함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쁘리모 레비는 1919년 토리노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1943년 유격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1944년 2월 아우슈비츠로 보내진다. 이송된 사람의 70-80%가 바로 가스실로 보내지고 수인들의 평균 수명이 3개월에 불과했던 아우슈비츠에서 10개월을 지내고 살아남은 레비는 토리노로 돌아와 수용소의 경험을 담은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다. 이후 화학자로 일하면서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 소설 등을 계속 발표해 작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87년 자살한다.

그는 화학자다운 관찰력과 절제된 문체로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다.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모습이 처절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이타심, 동정심, 인간에 대한 존엄 따위가 어떻게 그렇게 산산히 부서질 수 있는지 읽는 내내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끝내기가 아쉬웠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극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레비는'독일어를 할 줄 알았던 것, 화학자였던 것-조금 편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 그리고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진 자연주의자의 호기심'으로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꼽았다. 그가 살아남았던 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기율표>는  1975년 발표된 작품으로 21개의 원소에 대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어렸을 때의 회상, 환상적인 내용, 수용소 이야기, 이후 화학자로서 일할 때의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평소에는 관심 갖지 못했던 '물질', '공장'들의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지만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아우슈비츠에서 만났던 독일인 화학자와 우연히 연락이 닿았던 '바나듐'편이었다. 
어떤 집단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하는 방관자적인 태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참기 힘든 것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 때 바이엘 사가 주축이 된 IG-Farben 이라는 종합화학회사를 설립해 폭발물, 의약품, 독가스등을 생산해 막대한 이윤을 얻었는데 이 회사는 이후 여러 회사로 분할 되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단다.)

<고등학교 때 '하와이안 리나가.....' 하면서 1족부터 외웠던 기억이 난다. 전자의 갯수에 따라 딱딱 떨어지는 화학식을 꽤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 쁘리모 레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서경식의 이 책 때문이었다. 저자는 재일교포 2세로 그의 두 형은 1971년 북의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오랜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쁘리모 레비가 자살했기 때문에  토리노로 여행을 떠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고난에 대한 인간의 승리'가 명쾌했겠지만 그의 자살로  아우슈비츠 이후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의 재건이 아직 멀었다는 걸 보여준다고, 그는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말로 번역된 쁘리모 레비의 책은 세 권이다. 남은 한 권은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 토리노까지 돌아오는 여정을 다룬 <휴전>이다.
조금 머리를 식히고 <휴전>을 읽으려고 선택한 것이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인데 읽으면서 보니 2차세계 대전 때 독일이 무대이다. 당분간은 이래저래 수용소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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