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7. 23:24

D+152 070814 에르미타쥐(Hermitage) 미술관

상트에서 성가신 것 세 가지는?
우선 고드름, 봄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지븡과 발코니 등에서 떨어지는 고드름 때문에 일년에 몇 명씩 죽는다.
소매치기도 조심해야 하지만 경찰도 조심해야 한다. 경찰이 거주지 등록증을 빌미로 외국인을 괴롭히는 일이 빈번하다고.
그리고 여름에는 모기!, 늪 위에 만든 도시라 모기가 많다고.
도미토리 모기장에 구멍이 뚫렸는지 모기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

체크아웃하고 호스텔 옮기고 에르미타쥐 가야 한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도시락 라면을 먹으려는데 봄소풍님이 나와서 금방 밥을 해서 고추장에 비벼먹으라고 주신다.
음, 라면 국물에 고추장에 비빈 밥이라...최고의 아침 식사 되겠다.
본인보다 나에게 밥을 더 많이 퍼주시고, 다른 멤버들에게는 주지도 않는다. 
어제 새로 들어온 한국 사람도 오늘 한국 들어간다고 튜브 고추장 주고 가신다. 아, 내가 정말 불쌍해 보이긴 하나보다.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대부분 뻗어있어서) 서둘러 나온 시각이 벌써 9시 반.
찬비님이 새 호스텔까지 배낭을 들어다 주셨다. 다른 일행도 이쪽으로 옮길까 알아봤는데 방이 없어서 안 되겠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매일 지나다니던 에르미타쥐인데 막상 들어가려니 입구를 못 찾아 좀 헤멨다.
오늘도 여전한  Dvortsovaya광장 풍경. 기둥은  Alexander column 이란다. 의미는 잘 모르고.
11시가 넘어 도착했으니 줄이 장난 아니게 긴 것도 당연. 오늘의 미술관 순례도 험난하게 생겼다.
30분 기다려 12시쯤 입장. 학생은 무료.
거대한 궁전 안에 거대한 관광객이 있다. 거의 대부분 투어 멤버들이라 떼로 다녀서 피해다니기도 쉽지 않다.
1917년까지 황제가 살았던 겨울 궁전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 주요 소장품 수집은 카트린 여제때부터 시작되었다.
 3백만점의 소장품이 있고 전시되어 있는 것의 20배가 창고에 있다.

1057개의 방이 있는 겨울 궁전을 개조했으니 얼마나 넓겠는가. 구조도 무척 복잡하다.
론니에서 복사한 지도를 보고 다니는데 닫힌 방도 많고 계단이 너무 적어 내려가는 길 찾기도 어렵다.
화장실도 별로 없고. 뭔가를 보기도 전에 지레 지쳐 버렸다.

어제 공부한 대로 3층 프랑스 미술관을 찾아가 350번 방에 들어선 순간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도시 풍경. 아마도 알베르 마르께.
이 작가의 작품이 여러 개 있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 하지만 그의 그림이 모두 다 좋았다.
모네, 시슬리, 피카소 등은 이제 식상한데 마티즈의 그림이 여럿 있었다. <붉은 방>, <춤>, <음악> 등이 여기 다 있었다.
그 중 내 마음에 제일 들었던 건 <대화, Conversation>
여자는 앉아 있고 남자는 주머니에 손 넣고 서 있다. 그 사이 창문과 꽃밭.
둘은 대화하고 있지만 둘 사이는 왜 이리 멀어보이는지, 우리 사이의 거리는 왜 이리 먼 지, 과연 완전한 소통이란 있는건지... 이 그림 하나 만으로 나는 에르미타쥐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헬싱키 아테네움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이 쪽이 좀 더 '사랑'인 것 같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화가인지, 그동안 수많은 미술관을 돌아다녔지만 여기서 처음 봤다.
음울한 구름이 내려 앉은 파리 풍경. 파리는 실재보다 이미지가 강한 도시, 막상 가보면 별 것도 아니던데.

지쳐서 의자에 앉아서 졸다, 또 그림 좀 보다가 배고파서 식당 찾아 내려왔다.
카페테리아 자리를 겨우 찾아 앉아 빵 한 쪽과 콜라, 바가지 140루블.
다시 힘을 좀 내어 렘브란트를 보러갔다. 254번 방. 네덜란드 국립미술관보다 렘브란트 작품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돌아온 탕아>, <이삭의 희생>등 렘브란트이 걸작이 있는데 그 앞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보기가 힘들다.
<David's parting from Jonathan> 이 그림이 제일 좋았다.
어떤 배경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녀 사이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애타는 우정이랄까,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훨씬 더 많은 작품이 있겠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이걸로 충분.
세 시가 넘어 나왔다. 이 시간 쯤에야 단체 관광객이 좀 빠지는 듯 하다. 내일 다시 올까? 어차피 공짜니.
안의 작품을 보고 나니 에르미타쥐가 더 대단해 보인다.
그런데 러시아가 언제부터 관광대국이었던 거지? 이렇게 사람 많은 미술관은 몇 년 전 루브르 이후 처음이다.

이제 기차표 사러 가자.
카잔 성당 옆 central train ticket office 에 갔다. 지나가는 김에 한 장.
여기 건물들은 겉에서 보면 뭐하는 데인지 모르겠는데 안에 들어가보면 엄청나게 큰 공간이 있다.
표 파는 곳도 그랬다. 큰 홀에 벽에 죽 둘러 매표 창구가 있다. 모스크바 가는 표는 어디서 사야할까?
짐머 호스텔에서 만난 여진양은 여기서부터 이 창구 저 창구 돌림을 당하고 결국 2000루블짜리 표를 샀다고 하는데...
경찰에게 다가가 '비예 도 마스끄바?' 하고 물었다. 모스크바 가는 표. 여진양이 가르쳐 준 것.
경찰에게 안 걸리려면 선수를 치라고 들은 것도 있어서.
어떤 창구를 가르쳐 준다. 줄이 길다. 어떤 사람은 여권을 한 뭉치 갖고 와서 표를 여러 장 산다.

내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우선 '즈드랍스트 브이쩨' 인사하고, 종이에 날짜를 쓰고 '아진 비예 도 마스끄바' 했다. 아줌마, 알아들은 것 같다.  계속 뭐라뭐라 하는데 당연히 못 알아듣겠다.
요르단에서 만난 러시아 교환학생 은주가 가르쳐 준대로,
'싸므이 제쇼브이 빠좔루이스따'-제일 싼 걸로 주세요, 부탁해요
이번에도 알아들었단다. 그런데 또 뭐라뭐라. 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등에 식은땀이 난다.
내 뒤에 동양계 얼굴의 젊은 여자가 떠듬떠듬 영어로 거든다. 앉아서 가는 거 괜찮냐고 한다. 물론 괜찮지.
아줌마가 숫자를 적어준다. 426루블. 새벽 한 시 출발, 모스크바에 아침 열 시 도착이다. 
휴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쓰바씨바-고마워요, 아줌마랑 뒤의 여자에게 인사했다.
이정도면 그리 어려움 없이 기차표를 산 것. 제일 싼 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정도면 괜찮다.
러시아 사람들은 'Excuse me'하면 도망가는데 러시아말을 좀 하려고 하면 잘 도와주는 것 같다. 또 속이지도 않고.
어제 전화카드를 사러가서도 가게 할머니랑 손녀랑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주었다. 어디나 표정은 무뚝뚝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기차표를 사고 나니 한걱정을 덜었다.
저녁은 무슨 패스트푸드 점에서 새우 볶음밥. 새우 반, 밥 반, 대국의 볶음밥.ㅎㅎ 조금 짜지만 맛있다.
8시가 넘었는데도 환하다. 3일간 사람들하고 저녁마다 놀았는데 혼자 있으니 심심하다.
내일 가야할 모스크바 역 정찰하러  가보기로 했다.
러시아에 미인이 많기도 하지만 너무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다닌다. 엉덩이에 고양이 얼굴은 또 뭔가?
넵스키 대로 모습.
상트의 기차역은 기차의 목적지대로 이름이 붙여져 있다. 헬싱키 가는 기차는 핀란드역,
모스크바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모스크바 역(마스크 바그잘) 모습.
들어가 보니 의자도 하나 없고 편하게 기차 기다리기는 힘들겠다. 내일 늦게 와야겠다. 그래도 깜깜한 때 올 수는 없는데, 어떻해야 하나 조금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