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8. 10:54

D+261 071201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 트로츠키를 찾아서, 산 안헬, 꼬요아깐.

지하철이 있는 도시는 무서울 게 없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오늘은 산 안헬(San Angel)과 꼬요아깐(Coyoacan 코요테의 장소라는 뜻)을 둘러볼 예정.
원래 멕시코시티 외곽의 농업공동체였는데 도시가 확장하면서 편입되었고 조용한 분위기 때문에 예술가, 작가들이 많이 거주했고,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가 살았던 집이 있고 러시아 혁명가 뜨로츠키가 암살된 곳이라고.
뜨로츠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아닌가? 왜 그가 여기서 죽은 거지? 알아보러 지금 간다.
지하철 안의 노선표가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문맹자가 많아서일까?
MA de Quevedo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무슨 조각이었더라?
오늘은 토요일 자신토 광장(Plaza San Jacinto)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각종 그림, 기념품등을 팔고 있다.
해골 모양의 장난감을 찍으려 했더니 안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후 사진 찍는 거 포기.
산 앙헬의 거리 모습, 조약돌이 깔려진 길, 고급스러운 주택가가 이어진다.
여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까? 부자 동네 답게 거리에는 인적 하나 없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가 살던 집(Museo Casa Estudio Diego Rivera y Frida Kahlo),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선인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인상적이다. 
리베라 사망 50주기를 맞이해 지금은 보수중, 입장료는 받지 않는데 뭔가 복잡하고 둘러보기가 쉽지 않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는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이 집에 살았는데 구름다리로 연결된 분리된 건물에서 따로따로 살았다.
집은 그리 넓지 않고 2층은 천장이 높은 스튜디오로 꾸며져 있다. 재밌는 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 걸린 해골 모형도 인상적, 멕시코는 해골, 죽음에 관련된 이미지가 넘쳐나는 곳이다.
신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아즈텍 문명과 연관이 있을 것 같긴 한데 확실히 모르겠다.
디에고 리베라는 1957년 이 집에서 사망했다.
바로 이 작은 침대에서. 사진을 보면 거구였는데 죽을 때나 죽은 후나 인간이 차지하는 공간은 비슷한 것 같다.  
막상 그의 작품은 볼 수가 없어 좀 실망스러웠는데 이 그림 한 장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후아니타 로사스라는 소녀의 그림, 큰 눈망울로 정면을 응시하는 대담함, 커서 아름답고 멋진 멕시코 여인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공사중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리베라, 칼로의 삶을 가까이서 엿볼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이 주변은 서울로 치면 청담동쯤 되는 것 같다.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과 까페가 주택 사이에 끼여 있다.
스타벅스 발견, 여행 이후 처음 마시는 스타벅스 커피, 내가 세계화가 안 된 나라들만 다녔다보다. 아니면 스타벅스 커피를 구매할 수 없는 가난한 나라들만 다녔나?
오랜만에 까페 모카를 시키고(까페 모카 같은 커피는 스타벅스에서밖에 안 판다)여행의 여유를 부려본다.
자, 이제 꼬요아깐까지 가야 하는데 걸어갈까 생각하니 아무래도 무리다.
Vivero라고 씌여진 미니버스를 잡아탔다. 2.5페소,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건 그 도시에 완전 적응했다는 얘기.
멕시코 시티도 식민지 도시답게 바둑판 모양의 거리에 큰 가로가 죽죽 뻗어 있는 구조라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미니버스 안의 태극기가 반가워서 한 장.
비베로(Vivero-farm이란 뜻)에 내렸는데 다음 목적지 트로츠키 박물관(Museo Leon Trotsky)까지는 또 한참을 걸어야했다.
소련의 혁명가 뜨로츠키는 왜 멕시코까지 흘러들어왔을까?
뜨로츠키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해 1929년 고국에서 추방당한다. 터키, 노르웨이 등을 떠돌다가 1937년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칼로의 도움으로 멕시코에 정착하게 된다.  처음에는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나의 다음 목적지)에서 지내다가 1939년 그들과 결별하고 이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뜨로츠키는 끊임없는 암살 위험에 시달렸는데, 1940년 5월 스탈린주의자 시게이로스(벽화 운동 3인방 중 하나)가 이끄는 암살자들이 집에 총을 마구 쏘아댔다. 다행히 침대 밑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 해 8월, 그의 비서의 환심을 사서 접근한 암살자에게 도끼로 살해당했다.
정원 모습, 벽이 높고 보디 가드들이 망을 보던 망루도 있다.
조국에서 추방당했어도 낫과 망치의 이념은 버리지 않았던 뜨로츠키의 무덤.
그가 쓰던 책상, 타이프라이터, 오래된 흑백 사진들, 부인 나탈리 세도바가 사용했던 부엌 살림등이 그 당시와 똑같게 전시되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이념의 문제를 떠나서 사랑하는 조국에서 버림받고 외국을 떠돌다 결국 암살당한 그의 운명이 너무 가여워 마음이 안 좋다.
오늘도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 더 커졌기를 기대해 본다.

프리다 칼로의 집에 가기 전에 배가 고파 시장 쪽으로 갔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팔고 있다.
트리도,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았다.
시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푸드 스톨이 여러 개 있다. 내가 바로 원하는 분위기.
역시 옆 사람이 먹고 있는 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양이 맛있어 보이는 게 맛도 좋은 법, 역시 맛있다.

다시 힘을 내어 프리다 칼로의 블루 하우스로 갔다.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어 눈에 확 띈다.
프리다 칼로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 후 산 앙헬에서 지내다가 이혼, 재결합 후 다시 이 집으로 와 죽을 때까지 살았다.
정원에도 푸른색,
역시 해골로 만든 장식품.
실내에는 프리다가 그린 소품이 몇 점 있고 그가 수집한 그릇, 옷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리다와 디에고가 여기 살았다'
진짜 프리다의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그건 이미 너무 유명해져 멕시코 안에 남아있을 것 같지 않다. 개인 소장품이거나 미국, 영국의 큰 미술관에 가 있거나.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는 1920년대 초반, 프리다가 다니던 학교에 디에고가 벽화를 그리게 되며 처음 만났다.
디에고는 그 때 이미 유명한 예술가, 사회주의자였고 프리다는 소아마비, 교통사고의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몇 년 후인 1929년 2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으로 묘사되었는데 사랑-증오가 교차하는 열정적인 결합이었다.
디에고는 여성 편력이 심했는데 심지어 프리다의 여동생과도 바람을 피웠다. 프리다는 디에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그 또한 뜨로츠키 등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기도 했다. 
1940년 이혼했지만 다시 재결합한 후에 프리다는 블루 하우스에 머물렀고 디에고는 산 앙헬에 살면서 서로 다른 사람과의 연애 관계를 지속했지만 결혼 관계는 유지되었다고 한다. 

1954년 프리다는 블루 하우스에서 사망했는데 마지막 일기장에는 '떠남이 즐겁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씌여 있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날을 '내 인생 가장 슬픈 날'이라고 표현했다고.
그럼에도 디에고는 1955년 딜러였던 여자와 다시 결혼했었고 57년 사망했다.
결론 : 그들의 사랑은 나 같은 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또 하나, 난 그런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또 하나, 디에고, 그림은 좋지만 남자로서는 별로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걸까?

프리다 칼로를 찾아가는 오늘의 여행은 이제 끝, 꼬요아깐의 중심, Hidalgo 광장에 들렀다.
노점상과 거리의 악사, 많은 사람들이 토요일 오후를 즐기고 있다.
팁을 줬던가, 안 줬던가... 그래서 나를 노려봤던 걸까?
색색의 깃발이 늘어뜨려진 교회와,
예쁜 집들이 있는 거리를 걸어 지하철을 타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7시, 훌리오와 파티에 가기로 약속한 시간은 9시.
안토니오라는 할아버지 직원에게 파티 안내장을 보여주었다.
-여기 가도 괜찮을까요?
-글쎄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안내장을 갖고 있어요. 혹시 내가 안 올 때를 대비해서요
-응, 그럼 경찰을 보낼께.
난 안토니오가 주인인 줄 알았는데 밤에만 일하는 사람이고 엊그제 같이 따꼬를 먹으러 간 앙헬이 주인이란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

지하철에는 토요일 밤의 인파가 가득했다.
사람 많을 것이 분명한 쏘깔로 역에서 어떻게 훌리오를 만나지? 오늘의 약속이 무모했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 역이 쏘깔로인데 뭔가 안내 방송이 나온다. 쏘깔로, 알라메다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이 웅성웅성대기 시작하는데 지하철이 역에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플랫폼에 기다리는 사람은 몇 명 있던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던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다음 역 국립예술궁전에 내렸다. 역을 빠져 나오니 정말 인파가 많다. 날도 깜깜한데 이런 데서 헤매다가는 밟혀 죽거나 납치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훌리오, 미안, 하지만 너도 내가 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겠지?

-파티는 어떻게 하고 벌써 온거야?
안토니오가 묻는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경찰 두 명 준비시켜 놨는데, 어쨌든 안전하게 돌아왔으니 다행이야.
리즈가 와 있길래 어떻게 된 걸까 물어보니 아이스링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역을 스킵했을 거란다.
좀 실망해서 방에 들어와 있는데 안토니오가 데낄라 파티가 있다고 부른다.
원래 토요일 저녁마다 호스텔에서 쏘는 데낄라 파티가 있단다.

파티라는데 투숙객은 나와 어떤 영국 가이랑 둘 뿐, 앙헬이 큰 데낄라 병을 가져온다. 안또니오까지 우선 넷이 시작한다.
도수는 35도, 한 잔 원샷하니 정신이 알딸딸하다. 
-데낄라 파티에는 두 가지 룰이 있어. 첫째, 시작한 멤버끼리 한 병을 끝내야 하고, 둘째, 토한 건 자기가 치워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는 말란다. 언제든지 백업이 준비되어 있다고. 약간 강요한는 술자리, 어디서 많이 겪어 본 분위기다.
조금 있으니 백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동네 친구로 보이는 멕시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데낄라는 벌써 바닥을 보였는데 맥주도 마시고 안 되는 스페인어로 떠들고 댄서라는 다니엘과 살사도 췄다.
오, 춤추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건지 몰랐는걸, 멕시칸 파티가 이렇게 즐거운지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오늘 너무 많이 걸었고 너무 많이 마셨는걸, 음...이제 자러 가지 않으면 두 번째 룰을 지켜야 할지도 몰라...
멕시코 시티의 열기 가득한 토요일 밤이 이렇게 깊어가고,  매일매일 멕시코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