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0. 22:40

D+61 070515 tue 런던-스트랏포드어폰에이본, 연극 리어왕

어느 호스텔, 어느 침대나 3-4일 정도 지내다 보면 내 침대, 내 방처럼 느껴져서 떠나기가 아쉽다.
그러나 언제나 가야할 길이 있어 배낭을 주섬주섬 챙겨 떠나야 한다.
어제 이가 아파 진통제를 세 알이나 먹고도 병원에 갔던 프랑스 친구는 단지 검사만 하는데 120파운드라고 집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짐을 싼다.
여행하면서 아픈게 제일 문제, 치통 같은 게 괴롭히면 정말 어찌할 방법이 없겠다.
건강 체질로 태어난게 (아니, 태어났을때는 약골이었다고 들었는데...) 어찌나 다행인지, 부모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해야겠다.
체크 아웃하고 배낭을 잠시 맡기고 씨티은행으로 돈 찾으러 갔다왔다.
한국어 안내도 나오는 현금인출기다. 파운드가 원화 얼마로 환전되어 빠져나가는지,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거 좋은걸, 앞으로 씨티은행 많이 이용해야겠다. 있는 나라가 얼마 없어서 그게 문제다.

여전히 비오는 날씨,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동하기 쉽지 않은 날씨다.
런던, 이번에 못 돌아본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사치 갤러리 등을 돌아보러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을까?
런던 아이는 언제 타 볼 수 있을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지금은 물가 비싸고 비오는 런던을 떠나는 게 즐겁다.
패딩턴 역 안내판 모습.
점심으로 막스 앤 스펜서 푸드에서 산 김초밥.
독일어를 쓰는 듯한 배낭 여행자에게 데이카드를 주었다.
-너, 이거 필요할 거야
-어...고마워, 정말 고마워.
처음에는 뭔지 모르더니 무척 고마워한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ㅎㅎ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Stratford-upon-Avon 에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이러다가 영국의 모든 기차 종류를 다 타보게 될 것 같다.
기차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지역을 연결하고 기차편도 자주 있고 좌석도 편안하고 여행하기 딱 좋다.
그러니 요금이 비쌀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장애인 세 명이 탄다. 직원이 도와서 태워주고 내릴 역까지 같이 가주고 내리는 역에는 이미 직원이 대기하고 있다가 도와준다.
다르에스살람에서 길거리를 기어다니며 구걸하던 장애인이 생각난다. 달라달라가 오면 누군가가 안아서 태워주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사회의 일원으로 장애인을 받아들이는 사고는 똑같지 않을까. 우리나라 거리에서도 좀더 많은 장애인을 보고 싶다.
기차는 양떼가 풀을 뜯고 있는 초원을 달린다. 거의 모든 지역이 이런 풍경이다.
뾰족한 산은 아예 보이지 않고 부드러운 구릉들 뿐이어서 오래된 지형이란 생각이 든다.
지형도 오래되었고 이용한지도 오래되어서 별로 비옥한 땅은 아닐거라는 느낌. 저 양에서 광우병이 시작된 거였지...
Stratford-upon-Avon 에 도착.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 Avon 위에 Stratford 가 있다는 건데, 두 지명이 합쳐진 건가?
비슷한 지명으로 Stoke-on-Trent 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그것만으로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단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어린이 명작동화집에서 읽은 게 전부, 별 감흥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아는 그의 이미지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에서 본 게 다.
그런데 여기 온 이유는 동생이 런던에서 어학 연수할때 여길 방문했는데 B&B 가 아주 좋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공주침대라니...!
B&B(bed and breakfast, 아침식사를 주는 전형적인 영국의 숙박시설)가 많다는 Evasham place로 갔다.
많은 집들이 B&B 간판을 달고 있다. 그래, 이제 도미토리에서 벗어나 나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겠지.
그런데...방이 없단다. 'no vacancy' 팻말이 붙어 있거나 문을 두드려 물어보면 더블룸이 45파운드란다. 너무 비싸다.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고 이제 문 두드리기도 겁이 난다. 시 외곽에 있다는 호스텔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성수기인 여름에 숙소 잡기가 어렵다더니 벌써 성수기가 시작된 걸까? 휴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숙소를 찾고 있지요? 싱글룸?" 하고 묻는다.
내가 옆집에서 물어보는 걸 들었단다. 화장실은 방 바깥에 있지만 어차피 나만 사용하는 것이고 싱글룸 30파운드, 잉글리쉬 브렉퍼스트도 준단다. 아내랑 같이 경영했는데 아내가 암으로 죽어 지금은 혼자 손님 조금만 받고 있단다.
지금 비수기 아니냐고 했더니 여긴 항상 성수기란다.
그래서 내가 찾은 숙소, 아니, 나를 찾아온 숙소, Parkfield B&B, 저 이층 창문이 내 방.
어떻든 길에서 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비록 공주침대는 아니었으나.
돈 내려 했더니 후불이란다. 문도 그냥 열어놓고 다니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아저씨의 친절에 기분이 급 좋아졌다.
맘에 드는 숙소도 잡았고 시내를 둘러보러 나왔다.
영국의 소도시, 보통 주택가 풍경.
지나가다 만난 New place, 셰익스피어가 말년에 구입했다는 집, 화재로 터만 남아있다고.
내일 셰익스피어와 관련있는 장소 다섯 군데를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티켓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돌아볼 예정이다.

셰익스피어의 고향에 왔으니 그의 연극 한 편 정도는 봐줘야할 것 같다.
Royal Shakespeare Company 에서 제작한 연극, 지금 하고 있는 건 두 종류, 리어왕과 한여름밤의 꿈이었다.
리어왕에 Ian Mckellen 이 나온단다. 반지의 제왕에 나온 그 수염난 할아버지.
어차피 영어 다 알아듣지 못할테니 유명한 사람이 나오는 걸 보자.
오늘 걸 봐야 하니 리턴 티켓을 얻기 위해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나 말고도 기다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아래층이 원래 28파운드인데 기둥에 가려진 자리라 18파운드란다. 2층은 10파운드.
가려져도 보이긴 다 보인다는 말에 18파운드 짜리로 결정. 어떻다는 건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표도 손에 넣었으니 저녁을 먹어야겠다. 슈퍼에서 파는 음식도 여의치 않아 여행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맥도날드에 갔다.
치킨 버거와 커피, 4.2파운드. 크긴 무척 크다. 물가 비싼 나라에서는 맥도날드가 제일 싸고 싼 나라에서는 제일 비싸다.
오, 셰익스피어의 고향에서 그의 연극을 보다니 극장에 들어가니 마음이 좀 설렜다.
이게 내 자리, 기둥이 시야를 가리긴 좀 가리는 구나.
그런데 내 옆의 아저씨가 자기 부인이랑 같이 못 앉았다고 자리 좀 바꿀 수 있겠냐고 한다. 땡큐죠. 그 부인 자리가 훨씬 좋았다.
리어왕 줄거리를 까먹고 있었는데 연극을 보다보니 생각이 났다.
딸이 셋 있었는데 아첨한 위의 두 딸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었으나 결국 버림받고, 진실한 대답을 해서 재산을 못 얻은 막내딸에게 의지하며 살다 결국 다 죽었다는 이야기.

관객석 사이로 길게 무대가 놓여있고 배우가 왔다갔다 하면서 연기를 한다. 목소리가 크고 발성이 정말 좋아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이 좀 있었다. 분위기나 줄거리는 이해가 되었는데 농담이 안 들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웃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연극 연기는 좀 과장된 면이 있어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쨌든 배우들이 연기도 무척 잘 한다.
어떤 사람이 목매달아 죽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진짜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한참 매달려 있었던 걸까?
극장에 들어갈때 '이 연극에서는 총성, 누드 등이 나오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씌여있어서 리어왕에서 어디 누드가 나올 장면이 있나, 했는데 리어왕이 미쳐갈때 바지를 홀딱, 정말 홀딱 벗는다.
물론 난 깜짝 놀랐다. 학생들도 많이 보러온 연극이었는데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놀란 것 같았다.
그 장면이 꼭 필요한 장면인가 싶고 저런 대배우가 누드로 나오면 이슈가 될 것 같은데 아무데도 그런 얘기가 없어서 일상적인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리어왕은 점점 불쌍해지고 극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결국은 세 딸도 다 죽고 악역도 죽고 리어왕도 죽고 충실한 켄트공도 죽는다는 얘긴데 연극을 보고서도 셰익스피어가 왜 유명한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내 감각으로는 좀 오바된 이야기다.
연극 끝나니 10시 반, 컴컴한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방이 좀 춥다. 그러나 큰 길에서 떨어져 있어 조용해서 좋다. 이런 조용함,참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