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5. 21:54

D+83 070606 wed 알함브라 궁전, 세비야 도착

일찍 일어났다. 며칠 쉬었어도 배낭여행자의 감각은 죽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북적북적했을 거리가 조용하다. 청소차만 지나간다.
언덕을 오르고 한참을 가야하는데 같이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내가 일등인 줄 알았다.
드디어 알함브라 도착.
지금 시각 7시 15분, 그런데 벌써 30명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표를 얻을 수 있을까?
8시에 매표소 문을 열리더니 줄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너무 쉽다. 8시반에 입장할 수 있는 표를 샀다. 10유로.
유명한 하렘까지 들어갈 수 있는 표는 조금 더 비쌌는데 그건 패스. 왕의 여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니 별로...
문을 지나,
잘 가꾸어진 나무 사이를 걸어가면,
알함브라 궁전이 눈 앞에 나타난다.
높은 데 위치해 있어 그라나다가 내려다 보인다.
하얀 벽과 똑같은 색깔의 지붕.
궁전 내부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타일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는 모든 벽이 다 장식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는 것 같다.
여긴 유명한 곳이라 한국인 여행자가 꽤 보인다. 그 중 한 분이 찍어준 사진.
그런데 안내판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가이드북도 없으니 사전 지식도 없고.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라는데 글쎄...
그냥 궁전 여기 저기를 둘러보며 '알함브라의 궁전'의 기타 선율을 상상해 볼 수 밖에.
알함브라의 하이라이트인 것 같은 연못.
저 새들은 이 궁전에 사람이 살던 때부터 하늘을 날았겠지...
창문이 저렇게 높이 있는 건 내다보지 말라는 건가?
반구형의 아치도 그냥 밋밋한 게 아니라 이렇게 장식이 되어 있다.
기둥 하나하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이제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무슨 중요한 유물인지 유리벽에 가둬놓았다.
웬지 신비스러워 보이는 정원.
근데 이건? 물받이인가? 모든 유적은 황폐화될 운명인 것을 현대의 사람들이 그대로 보존하려고 애쓰는 것도 모순인 듯 싶다.
여기 저기 나무와 연못.
심지어 원형극장도 있다. 이것도 그 당시 같이 세워진 걸까? 나 왜이리 아는 게 없을까?
궁전을 지키기 위한 요새로 추정된.
아래는 이렇게 생겼는데,
올라가면 이렇게 보인다. 미로 찾기.
단단하게 지어진 느낌.
우와, 저 새들은 다 무얼까?
덥다. 또 이베리아 반도 아랍문화의 화려함에 지쳤으니 나가봐야겠다.
보너스로 장미 정원까지 만들어 놓았다.
아까부터 돌아다니면서 계속 마주쳤던 두 명의 한국인 여행자와 같이 걷게 되었다.
일주일의 여름 휴가를 이용해 빡세게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는 두 친구. 야간 열차를 타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좀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계획을 짜곤 했었다.
스스로에게 일 년이나 휴가를 주기로 한 나의 결정, 백 번 생각해도 너무 잘 한 일이다.
정말 여행을 즐긴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또래의 한국 여자들을 만난게 반가워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한국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식당, 궁전 입구에서 가깝다.
숲속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다.
빵과 올리브가 먼저 나오고,
샐러드, 또띠야, 비프 스테이크,
내가 시킨 건 연어 스테이크. 일인당 18유로.
평소 내 수준보다 좀 비싼 거였지만 한국말로 맘껏 얘기도 하고 좋았다. 음식맛은 가격에 비하면 별로...
나머지 여행도 재미있게 하라고 하고 헤어졌다. 원래 열 두 시 버스를 타고 세빌랴 가려고 했는데 세 시 반 버스를 타야겠다.
온도는 어제보다 낮은데 그래도 덥다.
시에서타 시간이 가까워 그런지 터미널 오는 버스에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지쳐 버렸다.
세 시 반 버스를 타고 세 시간 걸려서 세비야 도착. 버스비 18유로.
세비야의 첫 인상, 덥다. 그라나다보다 더 덥다. 7시인데 해는 쨍쩅하고 길에 사람도 별로 없다.
우선 예약해 둔 피카소 호스텔 찾아가야한다.
반 고흐, 피카소, 수르바란이라고? 모두 화가의 이름이다. 예술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반 고흐는 스페인 사람이 아닌데 차라리 달리나 미로가 낫지 않았을까?
San Gregonol 거리에 위치한 피카소 호스텔.
리셉션이 멋지다. 진짜 식물이 자라고 있고 화사한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주인 아저씨, 영어 한 마디도 못하신다. 내가 영어로 얘기하면 스페인어로 대답하니 알아들을 수가 없다. 대충 열쇠를 받아서 찾아가야지.
햇볕이 강해서 바깥으로 향한 창은 닫혀 있고 중정을 향한 창은 열어놓았다.
하룻밤에 18유로인 4인용 도미토리는 너무 좁고 답답하다. 커튼까지 내려져 있어 캄캄한데 시원하긴 했다.
샤워실도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는데 땀 범벅이었으니 대충 씻고 나왔다.
이제야 사람들이 거리로 나온다. 전차가 다녔던 듯, 레일과 전깃줄이 남아있다.
길도 넓고 해가 져가며 바람도 불고 좋다. 그라나다보다 덜 투어리스틱하고 소박한 분위기,
우선 관광 안내소에 갔다. 문 닫았을 시간이지만 벽에 많은 정보가 붙어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보니 내일이 휴일이란다. 웬 휴일? 일요일도 아닌데...
옆에서 같이 훑어보고 있던 한 여행자가 말을 건다
-내일이 휴일이라는 데 알았어요?
-아니요, 큰일이네요. 휴일이면 박물관도 안 열 수 있고 재미있는 일이 없는데요.
-그러게요. 그런데 숙소가 어디에요? 거기 좀 괜찮은가요?
-아니요, 도미토리인데 좁고 깨끗하지도 않아요. 숙소를 찾고 있어요?
-네, 그라나다에서 지금 막 도착했거든요
-아 그래요? 나도 그라나다에서 왔는데...세 시 반 버스로요.
-그 버스 놓쳐서 네 시 반 버스로 왔어요. 알함브라는 어땠어요?
-아침에 줄서서 들어가서 봤는데 생각보단 별로더라구요
-나도 거기 줄 서 있었는데...나도 그렇게 멋지지는 않더라구요.
잠시 침묵, 같이 지도를 보고 있다. 서로 머리를 굴리고 있다. 혼자고, 심심하긴 한데...그래서 같이 걷게 되었다.
-여행한 지 얼마나 됐어요?
-두 달 좀 넘었어요. 일년 계획이죠.
-그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직장을 관뒀거든요
-무슨 일을 했는데요?
-내과 의사에요. 이번에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일년 간 휴가를 갖기로 했어요.
-예? 의사에요?
무척 놀란 듯하다. 의료사고 같은 걸 겪어서 의사를 무지 미워하고 있는 걸까?
-나도 의사에요. 의대를 막 졸업했고 담주에 레지던트 과정에 들어가요. 그 전에 2주간 스페인을 여행중이죠.
그래서 존스 홉킨스 의대를 졸업한 애런을 만나게 되었다.

같이 숙소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도미토리는 싫고(커플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나) 싱글룸을 원하는데 싼 방이 없다.
스페인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서 고생하고 있다고, 웬만한 방은 다 50유로가 넘는다.
결국 아파트 식으로 된 숙소를 이틀 밤 100유로에 구했다. 화장실에 부엌에 마루도 딸려있고 너무 좋다.
나보고 도미토리 취소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여기 와서 자란다. 자기는 마루에서 잔다고. 환불도 안 되고 그럴 순 없지.
같이 저녁 먹으러 갔다. 스페인에서는 항상 타파스로 식사를 해결했단다. 모든 바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서서 먹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애런이 주문을 한다.
안주 개념으로 작은 양이 나오는 타파스, 한 접시에 2유로 정도로 가격도 부담 없고 여러 종류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어서 좋다.
나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맛 보는 건 이번이 처음. 맥주 한 잔에 곁들인 타파스가 너무 맛있다.
애런은 페루에서 생물학자로 1년간 일했고 완벽한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그 때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서 의사가 되기로 했고, 감염학을 전공할 예정이라고 했다.
작년에는 타이에서 에이즈에 관해 일 년 간 연구했고 그래서 타이말도 할 줄 안단다.
외국애들을 보면 대학 때 자원봉사도 많이 하고 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는 너무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내가 대학 다닐 때는 그랬고 의대는 아직도 그런 것 같고.
공부만 잘해야 좋은 의사가 되는 건 아닐텐데 말이다.
비싼 데 묵었다고 걱정하길래 레지던트는 돈을 얼마나 버냐고 했더니 한 달에 4500불.
많이 버네, 했더니 그 중 2천불을 학자금 대출금 갚는데 써야 한단다. 음, 그럼 물가 비싼 미국에서 그 돈으로 살기는 좀 어렵겠다.
맥주 두 잔 마시고 자리 옮겨서 2차. 원래 스페인 문화가 자리를 옮겨가며 밤새 술마시는 거란다. 우리랑 비슷하네, 노래방 빼고.
애런 호텔 주인이 내일 빅 퍼레이드가 있다고 했단다. 내일 9시 반에 성당 앞에서 만나 같이 퍼레이드 구경을 하기로 했다.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셨더니 나는 알딸딸해져버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1차, 2차 술마시러 거리를 헤매니 재미있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