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4. 09:53

D+234 071104 아빠와 산텔모를 돌아보다.

희미한 자명종 소리에 겨우 일어났다. 7시인데 아직도 두 개의 침대는 비어 있다. 역시, 여기도 파티의 도시인가?
일요일 새벽 공기는 차갑고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지하철에는 어제의 숙취를 끌고 귀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에세이사(Ezeiza)국제공항까지 가는 마누엘 티엔다 레온(Manuel Tienda Leon)버스는 산마르틴광장 가까운 곳에서 출발.
외진 곳에 위치해 찾기가 쉽지 않다. 가까이 있는 쉐라톤 호텔 벨보이에게 물어봐서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산마르틴 광장 가까이 있는 영국탑(Torre de los Ingleses).
 916년 아르헨티나 독립 백주년을 맞아 영국이민자들이 세운 것인데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할 때(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고 한다) 분노의 표적이 되어 많이 부서졌다. 아르헨티나는 전쟁에서 패해 포클랜드 섬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공항버스 요금은 32페소, 40분쯤 달려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9시 40분. 
아빠 비행기 도착 시간이 10시 5분이었는데 연착한다고 안내가 나온다.
현대적인 공항 모습, 산티아고보다는 좀 못한 것 같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여기 사는 사람인 것 같다. 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온지 24시간 밖에 안 됐는데...
10시 40분에 비행기 도착, 11시 30분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오, 마이 대디! 7개월만이다. 첫 말씀이 '너 정말 먼 데 와 있구나'
도쿄-뉴욕을 거쳐 30시간의 비행 끝에 지구 반대편으로 딸을 만나러 오셨다.
어렸을 때 본 책에 한국에서 땅을 파 들어가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나온다고 했으니 한국에서 가장 먼 곳임에는 분명.
앞으로 3주간 둘의 여행이 시작된다. 

공항에서 시내 들어오는 택시값은 고정 70페소, 둘이 타면  버스와 별 차이는 없다.

어제 예약해 둔 호스텔에 도착.
방을 못 보았었는데 오늘 보니 옥상에 따로 지은 옥탑방이다. 좁고 바닥도 맨 시멘트고 별로 안 좋다 .
아래층 인테리어에만 신경을 썼나보다. 어쨌든 여기서 이틀을 묵을 예정.
아빠 트렁크 하나에는 한국음식이 가득했다. 컵라면, 그냥 라면, 햇반, 김, 고추장, 컵떡볶이까지 있었다.
얏호, 챙겨주신 엄마께도 감사.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늘 일요일이라 산텔모 여기저기 거리 공연이 열리고 있다. 
산텔모는 부유한 사람들의 거주지였는데 1870년 황열병 유행이 닥치며 부자들은 북쪽 지역으로 이주했고, 이후 고향을 버린 사람들, 이민자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술과 노래로 마음을 달랬는데 그래서 탄생한 것이 탱고. 
집세가 싸 예술가들이 많던 곳이었으나 사람이 많이 몰려들며 집값이 올라 요즘은 레스토랑, 부티크 등이 더 많다.  
음악에 몰입한 꼬마, 커서 유명한 탱고 연주자가 되려나?
나이 지긋한 탱고 댄서, 관광객을 불러 춤을 추고 있다.
조금 출 줄 알았더라면 나도 한 번 춰보는 것인데...
거리의 악사인데 잘 모르는 내 귀에도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거리에서 동전 몇 개 던지고 듣기가 미안하다.
정말 많은 음악가들이 거리에 나와 있다.
어떤 팀은 팀원도 일고여덟명이나 되는데 피아노까지 싣고 와 연주를 하고 있다.
이 나라라고 특별히 음악 전공자가 많은 건 아닐텐니, 우리나라 전공자들은 다 입시학원에 가 있고 여기는 거리에 나와있는 것 같다.
도레고 광장(Plaza Dorrego)주변에는 그림, 골동품등을 파는 벼룩시장도 열리고, 일요일의  분위기가 좋다. 
점심 먹은 레스토랑.
아르헨티나 고기를 맛보시라고 스테이크를 시켜 드렸는데 뻑뻑하고 별로 맛이 없으시단다.
(스테이크를 먹을 때마다 그러셨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매번 제일 싼 것, 소스도 없이 고기만 나오는 걸 시켰기 때문)
그동안 한국말을 거의 안 해서 말도 잘 안 나오는 것 같고 또 일주일간 말도 별로 안 했기에 목도 아팠다는.

오늘 오후에는 아프리카에서 오버랜드 투어를 같이 했던 아르헨티나 가이 기를 만나기로 했다.
이메일도 몇 번 주고 받고 어제 전화까지 해서 5월 광장의 핑크색 건물(대통령궁)앞으로 약속을 했다.
7개월만에 만난 아빠를 버리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게 좀 그렇기도 하지만 오늘밖에 시간이 없고, 시차 때문에 쉬기도 하셔야할 거고,  남자를 만나러 간다면 좋아하실 게 확실하므로.
그래서 쉬시라고 하고 혼자 대퉁령궁 앞에 갔다.
핑크색 건물, 원래 이름은 정치관(Casa de Gobierno)인데 별명은 분홍집(Casa Rosada).

5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5시 5분에 도착하여 30분 동안 기다렸는데 안 온다. 
이건 또 뭐지? 40분이 지나 전화를 해봤는데 집도 핸드폰도 응답기로 넘어간다.
어제 전화했을 때는 그렇게 반가워했었는데 뭐 사고라도 당한 걸까? 아니면 멀리서 보고 별로라서 그냥 간 걸까?
트럭 투어할 때 둘 다 영어도 못 하고 혼자 온 사람들이라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역시 아빠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6시가 지나 돌아왔다.  
그래도 '나 바람 맞았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
돌아오면서 엠빠나다를 몇 개 사서 저녁으로 먹고 오랜만에 일찍 잤다.
(이후 기에게 다시 이메일을 보내봤지만 답장이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난 걸까?)


*공항 버스, 마누엘티엔도레온, 산마르틴 광장 주변, 쉐라톤 호텔 뒷쪽에서 출발. 3-40분마다 있고 40분 걸림. 32페소
*공항 택시, 고정요금제로 공항 내 부스에서  신청하면 된다. 70페소

(cyworld라고 씌여 있는 사진은 아빠가 찍으신 것, 게으른 여행자여서 사진도 별로 안 찍었는데 열성적으로 많이 찍으셔서 빌어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