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0. 21:34

D+253 071123 그레이 빙하까지 트래킹, 힘들다, 힘들어.

어제 먹다 남은 빵으로 아침을 먹고 짐을 싸서 나왔다.

팥빙수 얼음을 닮은 산.

우리가 잔 산장. 2달러를 더 주고 노르테 건물에서 잤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그래도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또레스를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이나 버스를 타고 나와서도 또레스는 보인다.

어제 시내에서 타고 들어왔던 버스를 기다린다.
여러 대의 버스가 들어오는데 미리 요금을 낸 것이기에 어제 타고온 버스를 타야 한다.

어, 갑자기 나타난 동물 무리.

아마도 삐꾸냐.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봤던 것과 비슷, 아니면?

물 먹으러 간다.

어제 타고 들어온 버스가 지나가길래 잡아탔다. 운전 기사도 낯익다.
Pudeto에 내려 페호 호수를 건너는 배를 타러 간다.

9시 30분 배는 벌써 떠났고 12시 배를 기다린다. 오후 트래킹 시간이 빠듯하겠다.

배 삯은 왕복 17000페소, 독점이니 비싸도 어쩔 수 없다.

호수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호수 주변 풍경,

눈 덮인 산,

눈 덮인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폭포,

호수에 비친 그림자,

고깔 모자를 쓰고 있는 듯한 봉우리,

아름답다.

하지만 연일 강행군으로 피곤한 건 사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30분 후 Paine Grande Lodge에 도착했다.

역시 그림 같은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훨씬 정돈된 분위기, 침대는 여태껏 본 도미토리 침대 중 가장 좋았다.

자, 다시 나가보자.

그레이 빙하까지는 3시간 반.

그레이 호수를 따라서 빙하까지 간다. 난이도는 중급.

우선은 넓은 골짜기, 분지라서 공기가 가라앉은 느낌, 한낮의 날씨가 꽤 뜨겁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호수에 도착.

우선 좀 쉬고.
호수를 따라 가니 그레이 호수가 나온다.

정말 색깔이 '그레이' 하다.

1998년 2km에 달하는 빙하가 무너져 호수가 얼음덩어리로 꽉 차서 유람선 운행이 중단되었었다고.

거의 10년이 지나 유람선 운행은 재개되었지만 그 때의 얼음 조각은 아직도 남아있다.

세 시간 정도 걸린다는 그레이 호수 유람선 투어,

우리는 튼튼한 두 발로 걷는 중.

산꼭대기의 눈도 언젠가 호수로 내려올 것이다.

산꼭대기 바위도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멀리 그레이 빙하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우후~ 머리칼이 휘날리도록 바람이 세지만 시원하고 좋다.

모레노 빙하가 인간의 손길과 너무 가까이 있어 비현실적이었다면 그레이 빙하는 자연과 하나되어 있어 더 빙하답다..

아마 전망대는 빙하 바로 앞일 것이다. 계속 가 보자.

그레이 호수를 따라가는 길이 쉽지 않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지루하게 이어진다.
돌아올 때도 만만치는 않겠다. 가도가도 끝없는 길,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끝까지 가긴 가야 하는데...
두 시간이 넘어서 5시 15분에야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빙하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 중간에서 보았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호숫가까지 내려가보면 빙하를 만져볼 수도 있겠지만 차가운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저렇게 가까이 보여도 내려갈려면 한참일 것.
깜깜하기 전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줌을 댕겨서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아, 돌아가는 길도 쉽지는 않다. 올 때 꼬박 4시간이 걸렸으니 해가 9시에 지고 9시 반까지 환하다 해도 서둘러야 한다.
대디가 점점 뒤에 처지기 시작한다. 늙으신 아버지를 매일 트래킹 강행군에 식사도 제대로 못챙겨드렸으니 아무리 묵묵히 따라오시는 분이라 해도 내가 좀 너무한 것 같기도 하다.
-너, 왜 그렇게 빨리 걷니?
-여기서 해가 지면 길도 안 보이고 큰일이에요. 가방 주세요
-괜찮은데 왜?
-나는 젊쟎아요!
소리를 빽 지르고 가방을 받아 멨다.

뒤 돌아본 그레이 빙하, 결국 여기서 전망이 제일 좋은 것을 끝까지 가보는 성격 때문에 괜히 고생했다.
사진도 안 찍고 최선을 다해 걸어 3시간만에 골짜기에 도착,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초등학교 때 고무찰흙으로 만들었던 지형,

해가 지니 갑자기 추워진다. 조금 늦어서 어두워지고 길을 잃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호스텔에 돌아와 침대를 보자마자 푹 쓰러져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다.
아, 이제 걷지 말아야지, 트래킹은 이걸로 끝.
뜨거운 물을 얻을 기운도 남아있지 않아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침낭 덮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