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5. 09:51

D+284 071224 크리스마스 이브는 시카고에서...

평소에는 6시 반 쯤 저절로 깨는데 오늘은 7시 반에 자명종 소리에 깼다.
조용히 짐싸서 나오는데 중국애 레이첼이 'Good Luck!', 한다. 그래, 너도.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에서 공항 가는 C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 흑인 중년 아저씨가 오더니 'How's doing?' 이라고 말을 건다. 페인트공인데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것을 잊고 일하기로 약속을 해버렸단다.
-여태껏 크리스마스에 일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죠.
그 아저씨가 버스를 타고 떠나 버리자, 이어폰을 꽂고 크게 노래를 따라부르는 어떤 젊은 남자가 오더니 어떤 지명을 말하며 거기 몇 번 버스가 가냐고 묻는다.
-나도 몰라. 그런데 거기가 뭐하는덴데?
뭔가 나이스한 것이 있단다.
어렸을 때 쿠바에서 왔고 시내 외곽에 살고 있는데 사우스 비치에 살고 싶지만 너무 비싸단다.
여긴 좋은 레스토랑도 많고 밤문화도 좋다고.
-나는 한국인 수미 조를 좋아해.
수미 조? 그게 누구지? 아, 성악가 조수미를 말하는 것.
한국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인 얘기를 하는 애는 일본애들 말고 처음이다. 매번 북한이 어떻다느니 개를 먹느냐는 등의 얘기만 물어보는데 말이다.
얘는 딱 게이 스타일인데 밤새 놀고 또 놀러간다는 얘기인가?
버스가 와서 나는 가야했다. 'Merry Christmas!'

C버스에서 J버스를 갈아타고 또 한참 지루하게 달려 열 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컴컴한 체크인 카운터에서 줄을 서 기다리며 또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줄이 빨리빨리 줄어서 다행.
카운터에서 티켓을 내미니 아저씨가 '너, 자켓은 어디 있니?' 묻는다. 나는 얇은 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배낭에 있는데요.
-그럼, 그렇게 입고 시카고에 간단 말이에요? 하하하하
웃기 시작한다. 이렇게 황당한 일은 처음이라는 듯이.
-시카고는 정말 추워요. Windy City라는 별명이 붙도록 바람이 불죠..
-단지 비행기에서 짐 찾는데까지만 가면 되는데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추울 거에요.
배낭에서 고어택스 점퍼랑 조끼를 꺼냈다. 내가 가진 두꺼운 옷 전부를 꺼낸 것.
-그래요, 그렇게 겹겹이 입는게 필요하죠.
옆의 직원에게까지 '글쎄, 이렇게 입고 시카고에 간대요' 하며 웃어댄다.
나도 웃을 수 밖에, 웃음은 전염되는 거니까.
-창가 자리를 줄 테니 내리면서 잘 봐요, 얼마나 추운 도시인지.

체크인을 마치니 10시 30분. 비행기는 11시 20분에 떠나고 10시 50분까지 게이트로 오란다.
쿠반 커피와 빵으로 배를 채우고 사두었던 전화카드가 아까워 공중전화에 갔다. 마이애미를 떠나면 쓸 수 없는 공중전화 카드다.
시카고에서 만나기로 한 닥터 초이에게 전화를 하고 한국의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수다를 한참 떨었는데도 전화가 안 끊어진다. 카드 말고 50센트를 넣어야 통화할 수 있는데 10분 이상 한 것 같다. 동생하고의 통화를 끊고 또 한국의 친구들에게도 전화해 봤는데 밤이라 그런지 아무도 안 받는다. 포기하고 전화 카드를 전화기 옆에 두고 게이트로 간 시간이 11시.
국내선 항공기니 금방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나는 미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자켓 벗고 허리띠 풀고 신발 벗고, 폭탄 있는지 없는지 진공인지 가스인지 쏴서 검사하고, 가방 안 다 들여다보고 안전 딱지 붙이고...
-비행기 놓치겠어요, 늦었어요.
여자 경찰이 심상하게 말한다.
-그러니 빨리 왔어야지요.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뛰어서 게이트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17분, 그런데 벌써 비행기 문이 닫혔단다.
What? Why? 이런 퍽킹 시추에이션이 있나. 지금까지 비행기 스무 번에 배 스무 번에 기차 삼십 번에 버스는 수백 번쯤 탔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비행기를 놓치다니...!
한 시 40분  다음 비행기로 티켓을 바꿔주었다. 다음 비행기가 바로 있고 거기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닥터 초이가 시카고에서 기다릴텐데, 내 짐은 제대로 잘 갔을까?

닥터 초이에게 다시 전화 시도, 아까 전화 카드를 버리지 말고 갖고 올 걸 그랬다. 또 쿠바 페스트리를 하나 먹고 동전을 바꾸어 전화를 시도, 아무리 해도 안 걸린다. 카드와 동전으로 전화거는 방법이 다르다. 휴대폰 앞자리 번호를 눌러야 하는지 아닌지, 지역 번호를 눌러야 하는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시도해 보고서야 결국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 마이애미, 들어오는 것도 힘들더니 떠나기도 힘들다.
한 시 40분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40분에 어떤 아줌마는 헐레벌떡 뛰어오고 비행기는 한 시 50분이 넘도록 출발을 안 한다. 아까는 뭐고 지금은 뭐야, 역시 마이애미는 나랑 잘 안 맞는 곳이다.

마이애미에서 시카고까지는 두 시간 40분의 비행.
처음에는 파란 하늘이 보이더니 시카고에 가까워질수록 구름이 나타난다.
미국의 대표적 공업 지대인 오대호(학교 때 배운 지식이 결국은 상식이 된다) 지역의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끝이 없어 보이는 바둑판 모양의 주택 단지.
구름을 뚫고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안 녹은 눈이 남아있는 광경, 추워 보인다. 아까 마이애미 아저씨가 비행기 내릴 때쯤 알 수 있을 거라고 한 말이 맞다.

공항에 내리니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 사람들 복장도 진짜 추운 겨울 복장이다. 역시 크리스마스는 추워야 제 맛이다. 
내릴 때는 아무 수속이 필요 없었고 내 짐은 다른 몇 개의 짐들과 같이 공항 한 구석에 얌전히 줄맞추어 놓여 있었다. 
나만 비행기 놓치고 허둥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시 공중 전화 시도, 역시 동전이 문제, 80센트가 없어 스타벅스를 찾아(미국에서 스타벅스는 구멍가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물 1리터를 거금 3.5달러를 주고 구입해 동전을 만들어 공중전화로 갔는데 바로 그 앞에 닥터 초이가 있었다. 
일 년 만의 재회, 반가움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이제 미국 생활에 익숙한 친구를 따라 무사히 미국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본 부산 홍보 깃발과 태극기. 미국에 오니 한국이 점점 가깝게 느껴진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대도시는 이런 면이 좋다. 대중 교통이 잘 발달 되어 있다.
오후 4시 반인데 벌써 깜깜해서 밤 8시, 9시 같은 분위기다.
한 시간쯤 걸려 시카고의 강남이라는 미시간 애비뉴 북쪽에 도착했다.
춥긴 춥다. 내가 가진 옷을 거의 다 입고 있는데도 추웠다. 마이애미에 두고온 햇빛이 조금은 그립기도 하다.

오늘의 숙소는 E Walton Pl에 있는 Milenium Knickerbocker 호텔, 원래 별 네 개 짜리인데 프라이스라인(Priceline)에서 베팅해 65불이란다.
역시 별 네 개 짜리니 좋긴 좋다. 지난 일 년간의 숙박 시설 중 제일 좋은 것 같다.
배낭을 던져 놓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가로수의 전구 장식, 거리를 달리는 마차,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시카고에 와 있다.
시카고에서 유명하다는 Stuffed Pizza를 먹으러 갔다. 맥주 한 잔과 모듬 튀김으로 먼저 배를 채우고 30분을 기다려 피자가 나왔다. 피자가 얇은 게 아니라 거의 5cm 두께로 피자라기보다는 케잌 같다. 한 조각 먹고 뻗었다. 나머지는 모두 싸갖고 가기로.
여긴 팁 18%가 거의 의무인 것 같다. 닥터 초이가 계산서에 볼펜으로 계산을 하고 팁 액수를 적는다. 핸드폰에 18을 곱하는 부가기능이 있는 것도 있단다.

이제 존 행콕 센터에 가서 야경을 봐야 한다. 시어스 타워도 시카고 야경을 보는 명소이긴 한데 거기는 돈을 내야 한다고.
존 행콕 센터 꼭대기의 바에 갔는데 창가에는 자리가 없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은 듯 여기저기 한국말이 들린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한껏 멋을 낸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온 백패커, 얇은 고어텍스 자켓으로 시카고의 추위를 견디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자꾸 위축되는 스스로를 느끼게 된다.
창가 자리를 못 잡았을 때는 여자 화장실로 가면 된다. 여기서 전망이 제일 잘 보인다고.  
인간이 만든 도시 문명은 밤에 볼 때가 제일 아름답다.
쿠바에 못 갔으니 쿠반 모히토 칵테일이라도 마셔야지. 아까 맥주에 칵테일에 알딸딸하게 취했는데 닥터 초이에게 끌려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보러 가까운 교회로 갔다.
성가가 멋졌던 크리스마스 예배였다.

오랜만에 세차게 쏟아지는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조용한 방에 누우니 오히려 잠이 안 온다.
역시 미국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인터넷으로 싼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한국의 고급 레스토랑보다는 싼 가격으로 양껏 기름진 서양 음식을 먹고, 프라이스라인에 베팅해 좋은 호텔에 할인된 가격으로 묵는 것.
하지만 아직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예약 없이 무작정 들이대도 빈 방이 있고, 웃음으로 무장하고 가격 흥정을 하고, 약간의 동전으로 팁을 대신하는 여행에 내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