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09:30

D+285 071225 크리스마스에 시카고를 걷다.

좋은 호텔은 아침 식사를 안 준단다. 진짜? 아주 안 좋은 호텔이나 아주 좋은 호텔은 아침을 안 주는군.
어제 싸온 피자는 느끼할 것 같아 먹기가 겁난다. 좀 게으름을 부리다 짐을 싸서 11시에 나왔다.
어제는 밤이라 몰랐는데 낮에 보니 엄청난 빌딩들이 있는 세련된 거리다. 여기가 Magnificent mile이라는 쇼핑의 중심가 N Michigan Avenue다.
이른 아침 문을 연 스타벅스를 찾아 노스웨스턴 병원으로 갔다. 닥터 초이가 여기서 무슨 연구에 참여했다고 익숙하게 안내를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이니 사람도 없고 조용한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쿠키로 아침을 먹으며 노트북으로 무선 인터넷을 잡아 이메일을 확인했다. 역시, 지금 제일 아쉬운 건 노트북이다.
이렇게 현대적인 병원에 와 본 건 한국 이후 처음,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직을 선 듯한, 수술복을 입고 피곤한 표정의 사람이 커피를 시키고 있다. 크리스마스나 12/31일에 일부러 당직을 서곤 했던(만날 사람이 없기에)2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닥터 초이는 콜럼버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고 나는 예약해 둔 HI Chicago hostel로 갔다.

한 시에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체크인이 오후 세 시란다. 가방을 수위실에 맡기라기에 들고 다니던 피자를 흑인 수위에게 먹으라고 했다. 너무 많아서일까? '진짜?'하고 되묻는다. 이따가 배가 고프면 어쩌지, 조금 망설였지만 짐이 될 것 같아 그냥 줬다. 무척 고맙다고 하는 것이 이런 일은 미국에서 흔하지 않은 것일까?
배낭을 두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밀레니엄 파크 쪽으로 걸었다.  스케이트장에 가족들이 나와 크리스마스 오후를 즐기고 있다.
시카고의 고층빌딩과 밀레니엄 파크의 조형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강철 구조물.
역시,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것이라고. 소재며 스타일이 빌바오 구겐하임과 비슷하다.
쨍한 겨울날씨,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내가 가진 옷으로 못견딜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보라가 몰아쳤다고 한다. 닥터 초이는 공항에서 배낭을 멘 내 모습을 보더니 당장 캐리어와 파카를 사야겠다고 했다. 하긴 미국에서 배낭을 메고 다니는 사람은 아직까지 못 보았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이 세운 공원일까? 여기 오면 그들처럼 암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일까?
미시간 호숫가를 걷는다. 이 추운 날씨에도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름이라면 산책할만 하겠다.
지난 가을의 낙엽을 머금고 있는 얼음.
겨울 풀밭에 뭔가 먹을 게 남아있는지 종종거리는 새들이 안스럽다.
시카고의 빌딩은 호숫가에서 떨어져서 짓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데 혼자 호숫가에 붙어 있는 건물이 있다. 법의 사각지대를 잘이용해 건설 허가를 받은 것이란다. 오프라 윈프리 등이 저 곳에 아파트를 갖고 있다고.
아까 걸어내려왔던 미시간 애비뉴를 따라 쭉 올라가봤다. 토요일이라 문을 연 상점이 거의 없는데 Walgreen이라는 약국 겸 잡화점만 문을 열고 있었다.
어제 올라갔던 존 행콕 센터 앞 트리. 어제는 무척 화려해 보였는데 낮에 보니 그저 그렇다.
모든 건물 앞에  떨어지는 얼음을 주의하라는 표지가 있다. 지나가고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을 어쩌란 말인지. 아마 누군가 그런 일을 당하고 소송을 해서 거액을 챙긴 것이 분명하다. 이후 소송에 대비해 미리 선수를 치는 것 같다.

호스텔에 돌아와 체크인을 했다. 미시간 애비뉴 북쪽에서 호스텔까지는 1.5km 정도의 거리. 아침에 걸어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내려온 것이니 4.5km쯤 걸은 것, 피곤하다.
호스텔 시설은 괜찮았다. 개인용 전등과 라커가 있고 공간도 널찍히다. 내 자리는 구석 이층, 조명이 가리지는 자리. 열 명이 묵는 싱글 섹스룸인데 열 명 중 한 명만 빼고 다 동양인이다. 한국어가 적혀 있는 수건이 널려 있는게 한국 사람도 있는 모양. 미국애들은 크리스마스에 다 고향에 돌아가고 갈 곳 없는 유학생들은 도시로 놀러가기 때문에 동양인이 많다.

요구르트로 저녁을 때우러 식당에 갔다가 앤드류라는 흑인을 만났다. 에그롤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공짜 음식이라고 나보고 먹으란다.
-공짜 음식? 이 물가 비싼 미국에 공짜 음식이 있어요?
-있죠. 공짜 음식도 있고 공짜 버스도 있어요. 카지노에서 준 거에요. 나는 이미 다 먹었어요.
-그럼 좀 먹을까요?
아까는 배가 안 고파 요구르트만 먹으려 했는데 한 개 먹어보니 맛있다. 공짜라니 더 맛있다. 
정확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는 교양 있어 보이는 흑인이다. 부모는 우간다 출신, 부모가 학위를 받고 있던 미국에서 태어났고 이후 우간다로 돌아갔는데 독재자 이디 아민 때문에 2년 만에 나라를 떠나 탄자니아, 케냐, 인도를 거쳐 미국에 온 지 20년째. 부모님은 지금 인도에 살고 있다고.
시카고에 온 이유는? 도박을 하러.
도박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데 눈빛이 달라지고 정말 열정적(?)이다.
-이게 중독이고 끝내야 한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도박 때문에 실직했고 1주에 300달러의 실업 수당을 받고 그 돈으로 도박을 하러 왔어요. 점점 더 싼 임금의 일자리 밖에 찾을 수가 없고 그러느니 실직 수당을 받는 게 나아요.
내일 같이 가잔다. 오늘 돈을 땄기 때문에 칩을 몇 개 줄 수 있다고 도박장에서 쓰는 칩을 보여준다.
-Oh, No, Thanks ,
나도 한 번쯤 가보고 싶기도 했지만 내일은 시카고 아트 뮤지엄에서 하루 종일 있을 예정이라 안 되겠다.
얘기하다 보니 한 두 개만 먹으려 했던 에그롤을 다 먹어버렸다. 저녁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굿 럭을 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