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8. 00:18

첫째날-1 우리집에서 타이완 창카이섹 공항까지

여행이 끝난 후 2년 동안 아무데도 가지 못했다. 1년의 여행으로 한 5년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슬슬 방랑벽이 도지기 시작, 그런데 기껏 계획했던 인도 여행은 건강상의 문제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직장을 옮기기 전 잠깐의 시간을 내어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기로 했다.
일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았으니 마일리지도 많이 쌓였을 법 한데 란칠레나 이베리아 등 아시안 마일리지가 적립 안 되는 비행이 많아 겨우 타이완 왕복표를 구할 수 있었다.

구정 연휴라 비행기 좌석도 부족해 대기를 걸어놓은 후에야 구한 2/15 출발, 2/22 귀국의 여정, 설날은 지나고 출발하게 되어서 다행, 중화권이라 구정이 대단한 명절이겠지만 그래도 3-4일 정도의 연휴겠지, 하고 출발.

1년간의 여행을 준비할 때는 55L의 배낭을 구입했는데 가방이 크면 거기에 맞게 짐이 늘어나는 것 같아서 이번에 32L 짜리로 새로 구입, 앞으로는 아무리 긴 여행이라도 여기에 채울만큼의 짐만 챙겨야겠다.
자명종으로 쓸 삐삐도 지난번 짐에서 찾아내었다.

비행기 시간은 8시 35분, 6시에는 공항버스를 타야 하니 5시부터 일어나서 짐을 챙겼다. 으~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것도 정말 오랜만. 전에 1년 동안 어떻게 이런 걸 매일 했는지 몰라.
출발 전 사진 한 장 찍어주고, 복장은 3년 전과 완전 동일, 전 세계의 먼지가 아직 묻어있을 고어 텍스 잠바를 다시 꺼내입었다.

공항에 좀 이르게 도착, 탑승 수속을 하고 나니 시간이 남는다.
플래티늄 비자 카드에서 제공하는  Priority pass 로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길래 가보았다.
세계일주 여행을 하기 전에 카드를 신청했다 무직이라고 거절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패스만 있었으면 참 유용했을텐데 말이다.

내가 간 곳은  Hub 라운지.
오호, 럭셔리 여행도 즐겁다.
음식 종류는 몇 개 없었지만 공짜, 세계일주를 하며 공항에서 쫄쫄 굶었던(공항 물가가 비싸므로) 많은 경우가 떠오르며 이 패스를 갖고 다시 한 번 떠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인터넷은 무료지만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공항, 우리 인천 공항.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비행기, 케세이 퍼시픽.
비행기가 떠오르니 가슴이 뛴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어떤 여행도 지난 긴 여행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그 때는 이랬었지, 하고 매번 비교하게 될 것이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서글픈 마음이 든다.
두 시간 반의 비행인데 기내식이 나온다. 그런데 향이 강해서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옆의 남자를 보니 파인애플, 수박 등 과일만 나온 기내식을 먹고 있다.
-그게 뭔가요? 이것보다 훨씬 맛있겠는걸요.
-Fruit plate 에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미리 이걸 주문해 두죠.
-아주 좋은 생각인데요. 다음부터 나도 그래야겠어요.
한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화교 청년, 대학은 타이완에서 다녔고 지금은 타이완에서 살고 있다고, 부모님은 중국음식재료도매상을 하며 한국에 계시기에 다니러 왔다가 가는 길이란다.

-왜 타이완 대학에 갔어요?
-화교에게는 여러 제한이 있었고 대학 등록금도 타이완이 싸거든요.
-타이완은 처음인데 어떤 곳인가요?
-글쎄요, 10년 전만 해도 한국과 타이완이 비슷했는데 지금은 한국이 훨씬 으리으리하죠. 타이완은 그대로인데 말이죠.
-타이완 어디가 좋아요?
-타이뻬이는 그냥 그렇고 남쪽이 좋아요. 음식이 맛있거든요. 가끔 차를 몰고 타이난 같은 데 가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돌아오기도 해요.
-중국하고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싸워서 통일해야 한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는 너, 나는 나, 그냥 분리해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죠. 중국은 너무 큰 나라니까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한다.
-와, 논이 정말 많은데요.
-3모작을 한다고 하거든요. 제가 본 건 아니고 책에서요.
비가 내리는 공항 모습, 비가 많이 오는 기후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 그치겠지? 
낯선 나라에 도착하는 느낌이 이런 거였구나. 뭔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은 느낌, 두려움보다는 설레임이 앞서는 느낌.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왔어요. 타이완에 대해서 말해줘서 고마워요.
-즐거운 타이완 여행이 되길 바랄께요.
끝까지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청년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나도 슬슬 갈 길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