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2. 10:05

D+221 071022 라파누이에서 자전거 타기

새벽에 빗소리와 바람 소리에 깼다. 마당에서 텐트 치고 자는 티유와 마크가 걱정되었다.
해가 뜨니 무척 좋은 날씨다. 바람이 좀 불지만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자전거도 좋은 생각일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일기를 쓰고있는데 어제 렌터카 회사 직원이 다른 팀이 빌릴 렌트카를 갖고 왔다.
사장은 아직 안 나왔다며 저녁때 애기하자고 한다. 스페인말을 하는 한스도 아직 자고 있으니 그러는 게 낫겠다.
어제 만났던 일본 친구 신페이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 들렀다. 같은 동양인이라고 얘가 더 신경을 써주는 것 같다.
가까운 캠핑장에 묵고 있다고 해서 이따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북적대던 호스텔이 투어리스트들이 각각 걷거나, 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가 버린 후 조용해진다.
자전거라도 타야겠다. 티유에게는 혹시 자전거를 또 망가뜨리면 어쩌냐고 자학 유머를 늘어놓았지만 또 그럴 일은 없겠지.
걷다가 다리를 부러뜨리면?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시내 자전거숍에 가서 제일 작은 파란색 자전거를 빌렸다. 바나나, 물, 빵 한 조각을 챙기고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모아이가 있다는 아후 아카비까지 갈 수 있으면 좋은데...
날씨는 좋고 푸른 바다에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고, 오랜만에 자전거 타니 재밌다.
여긴 어디더라?
그런데 좋은 순간은 잠깐. 길은 언덕길, 마을을 벗어나자 바로 비포장 도로가 되었다.
헉헉대면서 페달을 밟는다. 갈림길이 나오는데 지도도 안 가져와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냥 좀 평탄한 길을 택해 간다.
바다를 바라보며 쉰다.
손으로 낚싯줄을 던져 고기를 잡는 청년들. 파도가 세차서 옷을 흠뻑 적셨던데 혹시 쓸려나가기라도 하면 어쩌지?
절벽에 이르렀다.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차는 가끔 한 대씩 다니고 자전거는, 없다.
저기 어디쯤이 내 목적지였던가? 내 목적지가 있기는 한 걸까?
안 되겠다. 가다가 탈진이라도 하면 정말 방법이 없으니 이쯤에서 돌아가야 하겠다.
바다는 원없이 보고,
12시에 출발했는데 4시에 마을로 돌아왔다.
오늘도 여전히 꿋꿋이 서 있는 모아이.
이제 너희들을 봐도 아무 감흥이 없구나.
제주도 돌하루방이 크기는 좀 작지만 더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왠지 아쉬워 사진 몇 장 더 찍어주고.
라파누이에 3박 4일 있기로 한 건 적당한 시간 배분이었던 것 같다. 더 이상은 너무 심심할 것 같음.
오늘도 바람은 세차게 불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 길에 이보를 만났다. 굿 뉴스를 들었냐고 묻는다. 아니?
렌트카 회사에서 그냥 신용카드를 돌려주었단다. 왜인지는 모르겠고, 지나가다 일하는 사람 만났는데 그냥 돌려주더란다.
뭐야, 괜히 하루종일 속을 끓여댔다. 아마 어제 한스가 가서 강하게 얘기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어디 나를 물로 보고. 나 혼자였으면 당했겠지만 나에겐 친구들이 있었단 말이지.
기분이 좋아졌다. 자전거 타면서 좋아지긴 했지만 이 소식에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신나게 집으로 돌아와 비장의 무기, 비빔면을 만들었다.
정원을 바라보며 나만의 소박한 만찬.
역시 더울 때는 비빔면이 최고다. 이거 너무 맛있는 거 아냐?

숙소에 돌아온 체코 친구들은 9시에 하는 민속쇼를 보러갈까, 라파누이라고 이 섬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틀어주는 곳에 갈까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일본 친구 신페이에게 결과를 알려주러 옆의 캠핑장으로 갔다.
온통 일본인 뿐이다. 신페이 어디 있냐고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니 낮은 일인용 텐트를 가리킨다.
-텐트에서 자면 안 춥니?
-좀 춥긴 하지만 이스터섬에 가면 꼭 캠핑을 해야지, 오래전부터 생각했었거든.
텐트는 캠프장에서 빌린 것이라고. 흐음, 나도 가장 먼 곳에 있는 섬, 라파누이 땅에 머리를 대고 자 볼 걸 그랬나?
아까 체코 가이들을 만나 잘 해결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어쨌든 와줘서 고맙다고.

다시 돌아와 엽서를 쓰며 빈둥거리다 또 배가 고파져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다.
어제 같이 오롱고에 갔던 칠리언 중년 부부는 오늘 포르투갈 친구들과 차를 빌려 한 바퀴 돌고 왔단다.
같이 스테이크와 와인으로 거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포르투갈 친구들에게 말은 통해요, 물어보니 노력하고 있다고.

전기가 또 나갔다. 어제는 주인 아줌마가 초라도 켜 주더니 오늘은 그것도 없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설겆이를 하고 칠리언 부부는 주무시러 가고 포르투갈 친구들이 정원에서 시가를 피울 건데 동참하지 않겠냔다. 그거 좋지.
4주간 남미 여행중. 코임브라에서 온 두 명의 친구.
-리스보아와 포르투에 갔었죠. 코임브라는 건너뛰었고
 포르투갈 좋아요. 스페인 사람은 거만한데 포르투갈 사람들은 친절하더라구요. 여태껏 가본 나라 중 2번째로 좋아요.
-우리가 포르투갈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스페인 사람 만나면 포르투갈 사람이 거만하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히히 그럴 수도 있죠.
불빛 하나도 없는 컴컴한 바다를 바라보며 시가 냄새를 맡는 건 나쁘지 않았다.

누가 자전거를 타고 호스텔로 들어온다. 누구? 아까 봤던 신페이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왔다. 그래서 앉아 이것저것 얘기하게 되었다.
저녁으로 스시를 먹었단다. 캠핑장에 있는 일본 사람 중 하나가 요리사라 생선을 사다가 만들었다고.
-야, 나도 스시 좋아하는데 왜 나 초대안했어?
우리도 모여 있으면 김치찌개 같은 걸 만들어 먹었을까? 하지만 생선은 아무데나 있지만 김치는 아무데도 없으니.
라파누이에는 일본 음식점도 몇 개 있고 진짜 일본 프렌들리한 곳이다.
한국은 뭔가 더 남성적, 일본 남자들은 여성적(feminine)이라고. 일본 여자들은 순종적이고 한국 여자는  arrogant, strong하고. 음, 그런 것 같다. 
서양애들하고는 깊은 얘기를 나눌 수가 없단다. 뭔가 정서가 다르단다. 나도 가끔 그런 걸 느꼈다. 겉으로는 웃고 유쾌하지만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일본 애들은 그래도 같은 동양인이라 말이 더 잘 통한다.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하여 신페이는 11시에 돌아갔다.
조금 있다 전통쇼를 보러간 사람들도 돌아왔다. 그 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전기는 어떻게 공급하는 걸까? 자체 발전소가 있는 걸까?


*자전거 렌트. 하루 24시간 8000페소. 길이 험하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