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9. 22:32

D+257 071127 띠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아디오스 빠드레

뜨거운 물을 얻어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제 아빠가 갖고 오셨던 한국 음식도 거의 동이 났다.
그동안 한국 음식 많이 먹었으니 당분간은 그립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우선 쇼핑, 나도 별로 쇼핑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빠는 아주 질색하셔서 다음부터는 절대 아무 것도 사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신다.
어쨌든 펭귄이 그려진 티셔츠(모든 기념품에 펭귄이 그려져 있다), 모자 등을 샀다.
이젠 뭐하지? 비행기 시간은 저녁 7시.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을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잠깐 다녀오는 것 치고는 돈이 꽤 든다. 미니 버스가 일인당 40페소, 입장료가 20페소씩이다.
국립공원이라는데 별 특징은 없어보인다. 그동안 너무 멋진 것들을 많이 봐서 눈이 무뎌진 것일수도.
어쨌든 전망대까지 걸어가보자.
여기도 눈덮인 산.
계속 전망대 가는 길.
여기가 전망대? 잔잔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별 재미는 없다.
꽃구경.
새구경.
다시 바다.
줄곧 우리의 눈을 사로잡던 노란 민들레.
낮은 갈대와 어우러진 민들레.
부에노스 아이레스부터 대서양을 따라 달리는 3번 국도의 종착지.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는 3,063km,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끝 알래스카까지는 17,848km 떨어져 있다.
여기가 세상의 끝인 것일까?
다시 민들레와 눈덮인 산.
나무로 된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며칠씩 트래킹도 할 수 있는 공원이라는데 트래킹 코스는 이 쪽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 여기로 만족해야겠다.
조용한 바다.
쓸쓸한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아빠랑 셀카 한 장 찍고 돌아가자.
이게 아닌가?
이제야 제대로 찍혔네.
3번 국도의 끝까지 왔었다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여울을 건너 3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아직 비행기 시간은 좀 남았다. 슬슬 걸어다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인적 없던 바닷가에 서 있던 세계의 끝 우슈아이아 표지판.
바닷새를 쫓고 있던 아이.
Ushuaia, FIn del Mundo, Principio do Todo 우슈아이아, 세상의 끝, 모든 것의 시작.
Ushuaia, Endo of the World, Beginning of Everything. 차만 없었으면 딱 좋겠구만...
이제 여기까지 와 버렸으니 뭘 시작해야 하는 걸까?
바람 불고 너무 추워 가까운 땅끝 박물관에 들어가보았다.
우슈아이아의 역사와 식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원주민 사진들, 서양 사람들이 와서 다 죽여버렸을 것이 분명한.
아르헨티나땅의 남으로 내려올수록 가무잡잡한 사람이 많이 보인다. 살기 좋은 북쪽은 유럽인들이 살기 위해 원주민을 쓸어 버렸을 것이고 환경이 척박한 남쪽에는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우슈아이아로 항해한 배에 붙어있던 조각상.
우슈아이아는 처음에 죄수들의 유배지로 개발되었고 1950년대에는 해군 기지, 이후 금, 목재, 양털 등이 주 산업으로 발전했으나 지금은 관광산업이 주.
남아메리카 어디든 태양신이 빠지면 왠지 섭섭.
우슈아이아의 새, 어제는 이런 것 못 보았는데...
아, 어제 본 것, 강치.
입장료(성인 15페소, 학생 5페소)에 비하면 썰렁한 박물관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 나왔다.
나도 어제 알아봐둔 도미토리로 옮겨야 하기에 배낭을 가지고 택시를 탔다.
공항은 무척 작고 앉을만한 곳도 없다. 이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다.
-여행 어떠셨어요?
-아주 재밌었지. 나도 세계일주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 때문에 너는 하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하고 재미 없었지?
-아니요, 저도 재밌었죠. 혼자 다녔으면 트래킹 같은 거 안 했을 거에요, 또 지금 아니면 언제 아빠랑 여행 해보겠어요?
-그래, 고맙다. 집에서 생각할 때는 많이 걱정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 오히려 걱정이 안 된다.
사실 긴 여행에 모든 게 시들해지고 있었는데 아빠가 옆에서 너무 즐거워하셔서 나도  열심히 여기저기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러지 않았으면 파타고니아 여행이 훨씬 더 재미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이 대디, 베스트 여행 파트너, 저 따라다니느라고 고생하셨어요. 이제 한국에서 곧 봐요.
아디오스, 빠드레...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아빠가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 안에서 찍은 파타고니아 풍경.

나는 다시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야쿠시(Yakusi) 호스텔로 가 배낭을 두고 나왔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옆이 허전해서 일부러 빨리빨리 걸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우체국 모습, 그래 외로울 땐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자.
어제 여행사에서 받은 코코아 무료 쿠폰이 있어서 까페에 찾아갔다.
쿠폰을 보여주니 종이컵에 성의없이 따라주는 코코아, 그래도 아빠 것까지 두 잔이다!!
그냥 앉기 눈치보여 케잌을 하나 시켰다. 10페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그래도 따뜻한 카페에서 엽서를 쓰고 있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시간 남으면 늘 하던 일, 인터넷 카페에 갔다.
블로그 사진을 업데이트 하는데 메모리 카드가 비어있다는 메세지가 뜬다.
분명 또레스 델 파이네랑 우슈아이아 사진이랑 잔뜩 찍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충격을 가한 일도 없고 이미지 저장장치에 꽂았을 뿐인데.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절망감이 밀려 온다. 물론 아빠가 찍은 사진이 있지만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리니 상실감이 크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 이 기분을 계속 가져가면 안 된다.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단 말이다.

한 시간 반동안 인터넷을 하고 돌아오니 11시가 넘었다.
아래층에 어떤 남자애가 자고 있는 이층 침대에 기어올라갔다. 들어오는 애들 목소리를 들으니 모두 남자다.
6인용 도미토리에 남자 5명과 나. 오호, 이런 분위기 오랜만이다.
추워서 창문을 닫았더니 누가 금방 연다. 냄새가 안 좋긴 하다. 그래도 추운데...
하긴 얘네는 이런 날씨에도 반팔 입고 다니니 몸에 열이 많은 걸까?
으~ 아빠랑 같이 지내던 호텔방이 그립다.

(다행히 한국에 와서 메모리 카드를 복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인터넷 까페를 이용하다 보니 바이러스에 걸린 것 같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