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3. 14:15

D+68 070522 tue 리버풀, 비틀즈와 함께하다.

아침에 기차역에서 리플렛을 보고 버스패스가 있는 것을 알았다. 9파운드, 에고에고 내 돈 아까워. 역시 정보가 생명.
어쩄든 Windermere 를 떠나 맨체스터에 도착.
시골을 헤매다 갑자기 큰 도시로 오니 좀 어안이 벙벙.
맨체스터는 18세기 영국 면화 산업의 중심지였는데 이후 19세기 거쳐 20세기 들어오면서 경쟁에서 밀려 점차 쇠락했다.
1996년에는 아일랜드 해방군이 중심가에서 폭탄을 터뜨렸는데 기적적으로 아무도 죽지 않았단다. 미리 폭탄 터질 시간을 예고했다나.
이후 도시 환경을 개혁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런던에 이은 제2의 도시로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라고.
우리에게는 박지성 선수의 맨유구단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큰 길을 번쩍거리는데 숙소 찾아가는 뒷골목은 조금 음산하다.
인터넷으로 예약해 둔 맨체스터에서의 숙소, Hilton House. 외관은 허름한데 안을 현대적이고 편리하게 꾸며놓았다.
카드키를 사용하고 토스트는 하루 종일 무료, 6인실 도미토리가 17파운드인데 아.무.도. 없다. 독방이다, 얏호!
토스트로 배를 채우고 어차피 기차 패스를 사용했으니 오늘은 리버풀에 가보자.

리버풀은 맨체스터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
18세기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주요 항구로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과 면과 철강이 주로 거래되었던 곳이다.
이후 영국 경제의 쇠락과 같이 도시가 침체하게 되었는데 2차 대전 때 미국에서 병사들이 건너오는 주요 항구로 다시 각광받았고 이 때 전래된 미국 음악이 영국 락에 큰 영향을 끼쳤단다.
결국 리버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비틀즈의 고향이라는 것.
우선 알버트 독(Albert dock) 이라는 새로운 문화와 쇼핑 중심지로 가보자.
저기 보이는 게 그것. 방치되어 있는 항구 시설이었는데 1억 파운드를 들여 1980년대에 재개발 한 곳.
케이프 타운의 워터 프론트 지구와 비슷한 느낌인데 여기가 훨씬 오래된 것 같다.
적갈색 벽돌로 만들어진 창고 같은 건물들.
저기 보이는 멋진 빌딩은 뭘까?
외부는 허름해 보이지만 세련된 상점가와 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많다.
그 중의 하나 테이트 미술관. 런던 테이트의 분관으로 처음 미술관을 건립한 헨리 테이트가 이 곳에서 사업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상설 전시된 작품은 별로 없고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냥 한 번 훑어보았다.
다음 목적지는 비틀즈 박물관.
론니에는 그냥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이라는 평. 나야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한 번 들러봐야지. 학생할인 6파운드.
비틀즈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모형과 장소를 재현해 보여준다. 재미있는 전시였다.
나중에 존 레논이 암살당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비틀즈의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몰랐는데 참 대단한 밴드였던 것 같다.
6시에 나왔는데 또 해는 중천이고 숍들은 다 문을 닫고 있다.
돌아가기 전에 강(바다인 줄 알았는데 강이란다)이나 좀 돌아봐야겠다.
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가 '하이'하고 말을 건다.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피터, 리버풀에서 패션 카탈로그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 바람 쐬러 나왔다.
내가 일년 계획으로 세계일주를 하고 있으며 아프리카를 거쳐 왔다니 대단하다고 한다.
아시아는 태국 한 번 가본 일이 있는데(대개의 서양인이 방문한 아시아 나라는 태국이다.) 나중에 그 곳에 가서 여유있게 살고 싶다고.
지금부터 뭐 할 거냐고 해서 별 일 없고 이따가 맨체스터로 돌아가야 한다니까 리버풀 구경을 시켜주겠단다.
나야 그럼 좋지, 물론.
알아듣기 쉬운 명확한 영어를 구사하는데 그렇다고 얘기했더니 이탈리아에 오래 살아서 외국인의 심정을 이해한단다.
처음에 이태리어를 하나도 몰라 어려웠는데 문법, 단어 다 무시하고 막 얘기하기 시작했더니 어느날 모국어처럼 똑같이 구사할 수 있게되었다고, 나보고 영어 잘한다고 격려도 해 준다.
부두를 따라 걸었다.
아까 궁금했던 큰 건물.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로 Royal liver society 건물, 무슨 보험회사란다.
꼭대기의 새는 Liver bird 라고 불리는데 리버풀의 상징.
비틀즈가 처음 탄생한 매튜 거리.
그들이 공연했다는 캐번 클럼. 지금 있는 것은 1980년 초에 옛 모습을 재현한 것.
유명한 성당이 있다는데,
가보니 이런 성당. 나는 전통적인 성당을 생각했는데 꼭 체육관 같군. (나중에 보니 브라질 리오의 성당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로마의 바티칸 성당보다도 더 컸을텐데 리버풀 경제가 안 좋아지며 계획을 축소해 이 정도 크기.
안에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는데 문 닫는 시간이라 못 보았다.
피터가 찍어준 사진, 아저씨, 너무 멀리서 찍으셨쟎아요.
리버풀은 조용하다. 피터 말로는 젊은 사람들은 다 맨체스터나 다른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이 많단다.
쇠락해 가고 있다는 도시라는 인상.
어떤 젊은이가 펍에서 잔뜩 술을 마시고 던져놓은 듯한 운동화. 저걸 어쩌나...다음날 술깨서 신발 어디 갔나 고민 좀 했겠다.

피터는 기차역까지 나를 바래다 주었다. 우울한 하루였는데 나를 만나 즐거웠다고. 언젠가 이 도시의 삶을 접고 꼭 태국에 가서 느긋하게 살고 싶다고.
-리버풀을 보여줘서 고마워요. 이제 난 '리버풀'하면 비틀즈가 아니라 거기서 만난 친절한 피터씨가 생각날거에요.
9시 20분 막차를 타고 맨체스터로 돌아왔다.
영국 와서 누구하고도 얘기 안 한 날이 많았는데 오늘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웠다.